불멸의 명량! 호국의 울돌목!

Myeongnyang Battle Memorial Festival

축제유래

시대적 배경

  •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정유년(1597년) 7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배하여 거의 괴멸됨으로써 서해안으로 일본 수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이 시작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함.
  • 백의종군 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장흥땅 회령포에서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여 후퇴하면서, 한편으로 명량에서 일본 수군과 결전을 모색함.
  • 1597년 음력 9월 16일에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수군 13척은 울돌목 즉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과 접전을 벌여 그 중 31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음.
    • - 12척 문헌기록 : 충무공 행록 (이분 지음)
    • - 13척 문헌기록 : 선조실록, 사대문궤
    • - 12척 혹은 13척 어느 것을 써도 무방할 것으로을 판단됨.

역사적 의의

  • 명량대첩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 이후 수륙병진 전략으로 호남을 석권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정유재란의 흐름을 뒤바꾸었음.
  •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막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안을 무인지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강과 대동강, 압록강까지 도달하게 되어 명의 지원을 단절시키고 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명량해전 승리는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함.
  • 이순신이 불과 13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의 함대를 격멸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전쟁 지휘 통솔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의로운 전라도민들의 구국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됨.

명량대첩의 배경

  • 선조 30년(1597년) 7월 7일에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의 칠천량 해전에서 40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척의 전선이 12척이 남게되는 대참패를 겪음.
  • 7월 23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임명하여 수군의 재건을 맡김.
  • 최악의 여건이었지만 이순신은 8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전라도 남방 330여km를 우회하여 부임하면서 병력과 군량 및 무기를 갖춤.
  • 이 결과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고 전라우수영에 계류중이던 전선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전선으로 무장함.
    ※ 명량해전과 관련 사료마다 12척, 13척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모두가 틀린것이 아님.
  • 8월 19일 회령포에서 승선하여 명량 방향으로 후퇴하면서 4회에 걸쳐 왜 수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왜 수군을 유인하여 섬멸하는 계획을 수립.
  • 8월 29일 명량 입구에 위치한 벽파진에 주둔함.
  • 9월 15일 벽파진에서 싸움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우수영으로 진을 옮김.
  • 9월 16일 양도 앞바다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상대로 명량 대첩을 거둠.